본문 바로가기
리더십&성장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32. 제 2의 성

by 랜턴K 2024. 6. 6.
반응형

제 2의 성은 프랑스의 사상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대표 저서이다.
그녀는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데,

동시에 소련에서 의도적으로 파견된 간첩 혐의가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오늘날 페미니즘, 아니 소위 래디컬 페미니즘에 가까운 운동들이 
서구사회는 물론이고 한국사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야기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또한, 북한의 통일전선전술, 중국의 초한전의 내용 등이 실제로 

한국에 적용되었던 역사적 사례에 빗대어 본다면 더욱 그렇다.

보부아르의 간첩 혐의의 진위 여부와 별개로,

오늘날 한반도의 이념적 갈등에서 이득을 보는 이가 누구일지 생각해 볼만하다.

가령, 누군가의 의도가 깃든 마케팅에 의해 유혹 구매하는 건 아닐지 말이다. 

 

개인적으로 특정 사상에 대한 사회적 반감 그리고

실제 액트로써 드러나는 갈등이 극심해지기 이전에, 
대학 강의를 통해서 보부아르와 그녀의 사상을 접했던 적이 있다. 

보부아르가 정리한 성역할에 대한 통찰과 페미니즘에 대한 사유와 비교하면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정치적 액션만 두드러져 보인다.    

그에 대한 리액션 역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격할 수 밖에 없다. 

누구의 탓이라기보다 이미 안착된 다툼의 사이클 속에서는 갈등이 심화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이 책에서 예전에 배웠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 반가웠지만,

현실을 돌아보자면 다만 안타까울 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사회의 리더그룹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갈등을 냉각시키고,

이성적이며 건설적인 토론의 장을 형성할 수 있는 충분한 권력과 권위를 가졌다.

하지만, 오히려 이를 정치적 이점으로 활용하거나, 

혹은 활용하기 위해서 정책적인 무브먼트만 보인다.

정치인 뿐 아니라, 언론, 전문가 집단, 기업인 모두 책임의식이 있었으면 좋겠는 바람이다. 

 

페미니즘이 좋다 나쁘다의 결론 이전에, 

'왜 그런 결론이 도출되었는가'의 과정에 대한 토론은 쉽게 보기 어렵다. 

사회학 관점에서 뜯어보자면, 시사점과 활용성이 높은 통찰인데 참으로 아쉽다.  
보부아르는 제 2의 성 앞머리에서 아래의 문장을 남겼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여성스러움으로 정의되는 성질을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획득하게 됨을 의미한다. 
가령, 여성들이 핑크색 등 붉거나 밝은 계열의 색깔을 선호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색의 옷, 물건, 장난감을 받기 때문이라고 보부아르는 설명한다. 
또한, 어릴 때부터 여자아이는 폭력적인 놀이 혹은 매체 접근을 터부시하는 사회에서 길러지며 
인형놀이 같은 '여성스러움'에 부합하는 놀이를 주로 접하도록 강제된다.
이런 비강압적이지만 사회적인 반응과 환경들이 여자아이로 하여금 '여성스러움'을 강제한다. 

 

반대로 남자아이와 '남성스러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남자아이들은 '사회적으로 남성스럽다고 정의된'

푸른색 또는 어두운 계열의 옷, 물건, 장난감을 통해 기호를 선택당한다. 
또한, 남자아이의 폭력적인 놀이 (로봇 싸움, 전쟁 놀이 등)에 대해 사회는 관대하게 대응한다. 

남자아이가 인형 놀이 등의 '여성스러운 놀이'를 한다면, 

어른들은 즉각 '이상하다'는 사회적 반응을 보낼 것이다.  

 

보부아르는 생물학적 성별 이전에, 

사회와 정보 선택에 대한 자유가 없는 영유아기 때부터 
사회적인 성별의 구분에 따른 역할이 정해지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보부아르의 설명을 카운터하는 사회학 연구나 설명도 여전히 있다. 

하지만, 보부아르의 이런 사고의 흐름 만큼은 여전히 넓은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사회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다른 사회적 영향 - 종교, 정치, 문화 등- 에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이런 모든 것들이 주체적, 이성적, 공정 결정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런 사회적 유산을 되물림 받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이런 사회적 지식을 다음 세대에게 되물림하는 것은 

그 사회적 지식이 다음 세대가 안전하게 번영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사회적으로 기 합의된 지식이 없는 다음 세대는 생존에 위협을 받을지도 모른다.

다만, 생존과 번영에 대한 충분한 안전지대를 확보한 이후에,

동시에 사회를 재조립할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을 갖췄다면, 

내가 선택한 것과 선택 당한 것을 구분해 볼 만하다. 

 

저자는 보부아르를 설명한 뒤에

호프스테더의 국가별 문화적 차이를 결정하는 6가지 요소를 설명한다.

그 6가지는 아래와 같다. 

- 권력거리 지수
- 개인주의
- 불확실성 회피지수
- 남성성
- 장기적 적응
- 자율성 vs 통제성


여기서 저자는 남성성이란 항목에 집중을 한다.

호프스테더는 남성다운 사회(호프스테더의 예시는 영국이다)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남녀 역할의 구분이 확실하다고 이야기 한다. 

가령, 자기 의견을 적극적 주장해야하는 직업은 남성이 주로 차지하는데, 
이는 남성은 경쟁에서 이기고 출세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요구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대로 여성다운 사회(호프스테더의 예시는 프랑스다)에서는 성별 역할이 겹치며 
논리나 성과보다 양호한 인간관계의 타협, 지혜 ,공적이 중시되는 특성을 가진다고 정리한다. 

 

하지만, 오늘날 호프스테더의 연구 결과도 개인적으로 의구심이 든다.

사회적 남성성을 따지기에는 국가 또는 지리 등 통제되지 않는 변인요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불어, 호프스테더가 설명하는 사례의 반증으로 북유럽국가를 들 수 있다. 

성평등지수 초상위인 북유럽국가들은 오히려 직업간 성별 구분이 한국보다도 뚜렷하다. 
심지어, 북유럽국가들은 전통적인 가족관을 중시하며, 

남성이 밖에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전통적 남성성이 크게 요구되지도 않으므로
남성성이 짙은 사회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운 데 말이다. 


여성할당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아래 통계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미국의 어떤 컨설팅 회사의 조사인데,
미국 200대 기업의 임원을 조사한 결과 오직 16%만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회사들이 성차별적이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0%가 아닌 이상에야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위의 '간편한 결론을 내리는 기저'는 몇가지 전제를 포함하는데 
대표적인 전제 중 하나가 '여성이라 임원이 되지 못했다'라는 것일 테다. 

또 다른 전제는 '임원이 되는 것은 좋은 것이며, 유능함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럼, 통계를 하나 더 보자. 
임원의 50%에 가까운 사람들이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가졌다는 조사가 있다. 
임원이라는 집단은 소시오패스들이 과밀된 집단인데,
정말 그런 집단에 소속되는 비율이 낮은 것이 나쁜 것일까? 

임원이 되지 못한 직원들은 일반적으로 소시오패스보다 유능하지 않은가? 

 

위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나는 임원이 되고 싶으니까, 소시오패스가 되려고 노력해야겠다' 라던지

'누구누구가 소시오패스가 아니어서, 임원이 못되었구나' 라던지

'역시 남성들은 대부분 소시오패스에 정신적 문제가 많아' 라던지 

'저 사람은 승승장구하더니 그럼 그렇지, 소시오패스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무언가 어색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이라서 임원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결과보다, 그러한 결과가 어떻게 나왔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조직 입장에서는 결과에 깔린 조직의 생리가

앞으로도 존속되는 게 유리한지 아닌지를 고민해야 한다.

개인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조직의 생리를 맞춰서 임원이 될 것인지가 고민거리다. 

 

아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사회적 결과를 바탕으로 조직이 지속적으로 고민하도록 사회가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사회가 조직의 결정에 간섭하거나 강요해서는 안된다. 

첫째, 사회가 조직의 생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란 어려우며, 비이성적 불합리한 결정이 발생할 수 있다.

둘째, 조직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방향은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다. 

치약처럼,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에서 터쳐나오기 마련이다. 

 

최근, 대전역의 성심당 월 임대료에 대한 논란이 있다. 

코레일유통은 역사내 입점 매점에 대해 임대료를 매출의 22%를 받고 있다.

성심당 대전역의 경우는 5%만 내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성심당이 계약 과정의 특혜를 포기한다면,

(사실 계약 사항이라면, 합의 사항인데, 특혜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물론 찾아보니 이 외에도 입찰과정에서 불공정한 움직임들이 있긴 있다.)

현재보다 4배의 임대료인 월 4억 이상을 내야한다고 하며, (지금도 월 임대료 1억이상을 내고 있다)

지금까지 79억 정도의 편익을 본 셈이라고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계산기를 조금 두드려보면, 성심당의 대전역점 철수가 맞다는 결론이 나온다.

성심당이 대전역에 있는 게, 누구한테 좋은 일인가? 

서울 지하철에도 역사 내 매장에 공실이 가득한 판에,

월 꼬박꼬박 1억 이상, 연 12억 이상 코레일에 지급하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게 아닐까. 

과연 어떤 사기업이 역사에 월 4억, 연 48억을 내가면서 비즈니스를 할까 의문이다. 

연 48억을 내려면 매출이 200억 이상이 되야 한다. 코스닥 상장사 수준이다. 

코스닥 상장사를 역사 내 일부 공간만 주는 대가로 코레일이 입점시킬 수 있을까? 

 

코레일유통, 대전시, 성심당 등 내부인이 아닌 외부자들이 감놔라 배놔라 하는 덕에

내부자들은 lose-lose 게임을 하게 생겼다.  

물론 공정과 원칙도 좋고 중요하다.

하지만, 보통과 다른 결과를 만들었고, 만들어야 한다면,

과거의 조직의 생리가 앞으로도 존속되는 게 유리한지 아닌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나는 리더로써 제 2의 성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집단의 특성과 개인의 특성은 별개다.
가령 인도가 한국보다 인당 GDP가 부족해도
어떤 인도인이 한국인보다 가난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빅테크 CEO부터 한국 대기업보다도 부자인 인도인은 셀 수 없이 많다.

 

내가 특정 집단에 대해 갖는 편견과 
그 특정 집단에 속한 어떤 개인에 대한 생각을 일치시켜서는 안된다 
적어도 일단 내 구성원에 속했다면,
개인은 개인으로써 판단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내가 무의식으로 갖는 장벽이란 게, 그 사람의 실링을 막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견이란, 나의 조직원들 또한 삭제해야 할 일이다.
특히, 그것이 본인의 경험도 아니고, 통계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통계와 개인의 편견이 무분별하게 합성된다면,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서로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하는 조직생활에서는
조직원의 편견이 잔뜩 낀 대화가 퍼지는 것이 전혀 이롭지 않다.
사람들은 통계에는 없는 해석을 붙이곤 하는데,  
보통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새로운 소문이 쓰여지곤 한다. 

 

매우 난이도가 높은 일이지만, 조직원들 스스로 본인의 성역할의 바이어스를 해제할 수록

수평적이고 애자일한 조직 문화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출 수 있다.

남초 직장에서 두드러지는 전통적 바이어스 중 대표적인 것은 '남성은 여성을 배려한다'이다.

이에, 남성 직원은 여성 직원에게 감정적인 대응을 피한다.  

대신에, 다른 남성 직원에게 감정적인 커뮤니케이션에 거침이 적다. 

이러한 결과로, 의사결정권자의 업무의 성별에 따른 분류, 지시의 편향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일시적으로는 조직 내 여성 직원의 성공을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모진 상황에서 살아남은 남성 직원'이 고평가를 받게 된다.

여성직원은 '더 모진 상황'에 놓여볼 기회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권자 입장에서는 이미 장기간 평가를 마친 남성 직원이 

도전적이고 위험한 일을 맡기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조직 내 경쟁력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여성 직원은,

남성 직원보다도 높은 수준의 자발성과 인내력을 스스로 어필해야 한다.

한국 여성 임원들이 여성가족부의 활동에 큰 공감을 보내지 않는 데에서 맥을 짚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여초 직장에서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에, 리더는 가능한 의식적인 구조적 평등에 가까운 액션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각 조직원들에게 공정한 방향이며,

각 조직원들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탐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응형